후쿠다 도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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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쿠다 도쿠조는 일본의 경제학자이자 사회 정책가로, 1874년 도쿄에서 태어나 1930년 사망했다. 그는 도쿄 고등 상업 학교(현 히토쓰바시 대학) 교수를 거쳐 게이오기주쿠 대학 교수, 도쿄 상과대학 교수를 역임하며 경제학 발전에 기여했다. 사회정책학회에서 활동하며 민본주의를 옹호하고 복지 국가론을 주장했으며, 관동 대지진 이후 실업률 조사를 실시하는 등 사회 문제 해결에도 힘썼다. 또한, 한국의 봉건제 부재를 주장하며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식민사관을 제시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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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다 도쿠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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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후쿠다 도쿠조 |
원어 이름 | 福田徳三 |
로마자 표기 | Fukuda Tokuzō |
출생 | 1874년 12월 2일 |
출생지 | 도쿄부 간다 |
사망 | 1930년 5월 8일 |
사망지 | 도쿄시 요쓰야 니시시나노마치 게이오기주쿠 대학 병원 |
국적 | 일본 제국 |
학력 | 국가 경제학 박사, 법학박사, 뮌헨 대학교 |
직업 | 경제학자 |
소속 | 도쿄 상과대학・게이오기주쿠 |
분야 | 경제학 |
모교 | 도쿄 고등상업학교・뮌헨 대학교 |
사사 | 루요 브렌타노 |
제자 | 좌우전희이치로 판서유장 고이즈미 신조 적송요 정등반례 오쓰카 금지조 오쿠마 노부유키 오니시 이노스케 다카시마 젠야 스기모토 에이이치 데즈카 주로 나카야마 이치로 야마다 유조 우에다 사다지로 후쿠다 게이타로 미야시타 다카요시 미야타 기요조 노무라 겐타로 야기 조이치 |
학위 | Doktor der Staatswirtschaft (국가 경제학 박사)・법학박사 |
수상 | 제국학사원 회원 정4위 훈2등 서보장 프랑스 학사원 외국 회원 레지옹 도뇌르 훈장 |
학문 | |
학파 | 신고전파 경제학 |
2. 생애
도쿄 간다에서 태어났다. 고등상업학교(후의 도쿄고등상업학교, 현재의 히토츠바시대학)를 졸업했고, 1898년 독일에 유학해 1900년 뮌헨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등상업학교, 게이오대, 도쿄상과대학(히토쓰바시대)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0년 당뇨병으로 게이오병원에 입원, 충수염으로 사망했다.[14]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에 여명회를 조직해 민본주의 계몽을 위해 노력했다.[1]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마르크스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에서 민본주의, 자유주의에 서서 정부에 의한 사회·노동문제 해결을 주장했다.[1] 일본 복지 국가론의 선구자로 꼽힌다.[1]
후쿠다 도쿠조는 1903~1904년에 걸쳐 '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한국에 봉건제가 없었으며, 이 때문에 사회가 정체되어 근대화에 뒤처졌다고 주장했다.[18] 그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한국의 사회경제적 발전 단계가 일본의 가마쿠라 시대보다 뒤진 10세기 후지와라 시대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1874년 도쿄 지요다구 칸다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크리스찬이었기 때문에 1885년 12세 때 쓰키지 신에이 교회에서 우에무라 마사히사로부터[4] 세례를 받았다.[5][6] 타이메이 초등학교에서 사립 도쿄 영어 학교 등을 거쳐[7] 어머니의 유언과 누나의 권유에 따라 고등 상업 학교(후의 도쿄 고등 상업 학교, 현재의 히토쓰바시 대학)에 입학하여, 학생 시절에는 도쿄의 빈민굴(슬럼)에서의 전도 활동에 참여했다.
1894년 동교 졸업.[8] 같은 해 세키 하지메 (후에 오사카 시장)와 함께 고베 상업 학교(현・효고현립 고베 상업 고등학교) 교사로 취임했다. 1895년 교사직을 사임하고 고등 상업 학교(현 히토쓰바시 대학) 연구과에 입학. 1896년 동교 졸업.[9] 1898년부터 문부성에 임용되어 독일의 라이프치히 대학교나 뮌헨 대학교에 유학하여, Karl Bücher|칼 뷔허de나 루요 브렌타노에게 사사하여, 1900년 뮌헨 대학교를 졸업하고 박사 학위(도쿠토르 데어 슈타츠비르트샤프트)를 취득했다. 학위 논문은 "Die Entwicklung der Wirtschaftseinheit in Japan"[10]이다. 유학 중에 이시카와 이와오·이시카와 분고·칸다 노부·다키모토 미오·쓰무라 히데마쓰·시다 고타로·세키 하지메와 함께 베를린에서 "상업 대학의 필요"를 건의하여, 도쿄 고상(도쿄 고등 상업 학교)의 대학 승격 운동을 시작했다.
1896년 고등 상업 학교 강사, 1900년 동교 교수로 취임한다. 1902년 아오모리현에서의 대흉작으로 기근이 발생하여, 그 원인을 고찰하기 위해 1903년 아오모리로 향했다. 그는 기근의 원인을 "농촌에 화폐 경제가 침투하지 않고, 농가가 영리적인 정신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결론지었다.
1904년에 휴직 처분을 받았다. 교장인 마쓰자키 구라노스케 (전 도쿄 제국대 교수, 후에 학생에 의해 추방됨)와의 대립이 원인이라고 한다. 같은 해 부흥 운동을 일으킨 스게 레이노스케 (후에 도쿄 전력 회장)가 방학 처분을 받았다(후에 복학). 휴직 중인 1905년 미노베 다쓰키치의 추천으로 도쿄 제국 대학 법과 대학에 논문을 제출하여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11]
1906년에 휴직 기간이 만료되어 고등 상업 학교를 퇴관했다. 급여가 나오지 않아 오다와라의 소다 기이치로 별저에 살면서, 다카하시 사쿠에이, 사카타 시게지로, 혼다 구마타로, 사토 나오타케의 알선으로 외무성의 번역 일을 하며 생활했다.
후에 스루가다이에 하숙했다. 혼다 구마타로의 알선, 나토리 와사쿠 등의 노력으로 1905년부터 1918년까지 게이오기주쿠 교수. 게이오기주쿠에서는 고이즈미 신조 (경제 이론, 문화 훈장, 전 게이오기주쿠 주쿠장), 다카하시 세이이치로 (경제학사, 문화 훈장 수훈자) 등을 길렀다. 1918년 미우라 신시치와 소다 기이치로 등의 알선으로 도쿄 고등 상업 학교 교수로 복귀, 1920년 도쿄 고상의 대학 승격에 따라 도쿄 상과대학(현·히토쓰바시 대학) 교수로 취임.
1922년 4월 7일, 제국 학사원 회원이 되었다.[12] 1923년 내무성 사회국 참여로 취임. 같은 해 간토 대지진 직후에 직접 학생들을 이끌고, 실업률의 조사를 1만 324세대 (약 3만 6000명)을 대상으로 8일간 실시하여, 그 결과를 바탕으로 도쿄 전체의 실업률을 추산하여, 국가나 도쿄시 (현재의 도쿄도)에 대해 복직에 대한 세심한 지원의 필요성을 호소했다. 또한 저서 『영생 기회의 부흥을 서두르라』에서 "부흥 사업의 첫 번째는 인간의 부흥이어야 한다"고 간토 대지진을 구체적인 예로 들어, 이전부터 주창하고 있던 생존권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1928년 구로다 세이키에 이어 일본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프랑스 학사원 문학부 외국 회원, 레지옹 도뇌르 훈장 오피시에 수훈[13]되었다. 1930년 당뇨병으로 게이오 병원에 입원, 5월 8일에 맹장염으로 사망[14]했다. 같은 날 정사위훈3등 욱일 중수장을 수훈[15][16], 훈2등 서보장을 수훈[17]받았다. 묘소는 다마 영원에 있다.
3. 활동
사회정책학회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으며,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에는 요시노 사쿠조와 함께 여명회를 조직하여 민본주의를 계몽하는 데 힘썼다.[2]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며 민본주의, 자유주의를 옹호하며 정부에 의한 사회·노동 문제 해결을 주장, 가와카미 하지메와 논쟁을 벌였다.[2] 일본의 복지 국가론 선구자로 평가받는다.[2] 내무성 사회국 참사관으로 정책 입안에도 참여했다.[2]
후쿠다의 장서 44,841권은 오사카 시립 대학(구 오사카 상과대학)에 "후쿠다 문고"로 소장되어 있다.[2]
4. 주장
4. 1. 사회 정책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에 여명회를 조직해 민본주의 계몽을 위해 노력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마르크스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에서 민본주의, 자유주의에 서서 정부에 의한 사회·노동문제 해결을 주장했다. 일본 복지 국가론의 선구자로 꼽힌다.
사회정책학회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으며, 요시노 사쿠조와 함께 여명회를 조직하여 민본주의를 계몽하는 데 힘썼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며 민본주의, 자유주의를 옹호하며 정부에 의한 사회·노동 문제 해결을 주장, 가와카미 하지메와 논쟁을 벌였다. 일본의 복지 국가론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또한 내무성 사회국 참사관으로 정책 입안에도 참여했다.
후쿠다는 "시장에 의해 자원 배분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면 사회적인 강자·약자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며,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18] 하지만 국민에게 인간으로서의 최저 보장(생존권의 사회 정책)도 정부에 제언했다.[19] 후쿠다는 "누가 도태되어야 하고 도태되지 않아야 하는지 등, 누구도 알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최소한의 보장을 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말했다.[20]
관동 대지진이 일어난 후, 피재자의 실태 조사를 실시했다.[21] 저서 『부흥 경제의 원리 및 약간의 문제』에서는 유형 재산(물)의 손실보다 피재자들의 인간성 손실에 대해 더 많이 언급하고 있다.[21]
4. 2. 경제 이론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에 여명회를 조직해 민본주의 계몽을 위해 노력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마르크스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에서 민본주의, 자유주의에 서서 정부에 의한 사회·노동문제 해결을 주장했다. 일본 복지국가론의 선구자로 꼽힌다.
후쿠다는 "시장에 의해 자원 배분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면 사회적인 강자·약자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며,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18] 하지만 국민에게 인간으로서의 최저 보장(생존권의 사회 정책)도 정부에 제언했다.[19] 후쿠다는 "누가 도태되어야 하고 도태되지 않아야 하는지 등, 누구도 알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최소한의 보장을 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말했다.[20]
관동 대지진이 일어난 후, 피재자의 실태 조사를 실시했다.[21] 저서 『부흥 경제의 원리 및 약간의 문제』에서는 유형 재산(물)의 손실보다 피재자들의 인간성 손실에 대해 더 많이 언급하고 있다.[21]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금 해제에 반대하면서도, 경제 격차를 조장하는 것으로서 전중·전후의 인플레이션을 문제시했다.[22] 후쿠다는 어빙 피셔의 화폐 수량설을 지지하며, 정부·일본은행에 의한 "화폐 조절"로 인플레이션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22] 그러나 1925년경부터 구 평가 금 해제론자로 전환하여,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 발족에 즈음하여 디플레이션 하에서의 긴축 재정을 지지했다.[23] 후쿠다는 1920년 이후의 부실 채권의 누증을 문제시하고, 부실 채권 문제를 해소하지 않는 한, 일본은행은 물가를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24]
4. 3. 한국 봉건제 결여·정체성론 (비판)
후쿠다 도쿠조는 1903년에서 1904년에 걸쳐 '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한국에 봉건제가 없었으며, 이 때문에 사회가 정체되어 근대화에 뒤처졌다고 주장했다.[18] 그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한국의 사회경제적 발전 단계가 일본의 가마쿠라시대보다 뒤진 10세기 후지와라시대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후쿠다는 "시장에 의해 자원 배분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면 사회적인 강자와 약자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며,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18]
후쿠다는 조선의 봉건 제도 결여설을 통해 식민사관을 처음 주창하여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한 논자로 평가받으며, 현대 한국 연구자들에게 비판받고 있다.[25]
그는 「한국의 경제 조직과 경제 단위」(1903년 - 1904년)라는 논문에서 자본주의 발전 단계를 봉건 제도 이전의 "자급 경제", 봉건 제도 시대의 "도부 경제", 근대 국가 시대의 "국민 경제"로 분류했다.[25] 그리고 20세기 초 조선 경제가 봉건 제도 이전의 "자급 경제" 단계에 속하며, 일본의 헤이안 시대, 유럽의 프랑크 왕국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즉, 조선 경제는 일본이나 유럽에 비해 1000년이나 지체되었으며[25], 자본주의로 발전하기 위해 필수적인 봉건 제도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근대화가 불가능하고, 외국의 힘, 특히 일본의 국력에 의해서만 발전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25]
그는 논문 「한국의 경제 조직과 경제 단위」를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25]
> 한국에서의 경제 단위의 발전은 자발적인 것으로는 할 수 없고, 전래된 것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전래적이라는 것은, 다른 경제 단위의 발전한 경제 조직을 가진 문화에 동화하는 것이 된다. … 한국의 토지를 개척·경작하여 서서히 이것을 자본화할 수 있도록, 그 가치를 높이는 방법을 아는 자여야 한다. 그러면 한국에 많은 경제적 설비를 베풀고, 수천 년간의 교통에 의한 이해와 동정으로 한인의 사용에 익숙해지며, 한인의 토지를 사실상 사유하여 서서히 농업 경영을 시도하고, 더욱이 그 생산품인 쌀·대두의 최대 고객인 우리 일본인은, 이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자가 아닐까. 하물며 그 봉건적 교육은 세계에서 가장 완미한 것의 하나이며, 토지에 대해서는 가장 집중적인 농업자이며, 인간에 대해서는 한인에게 가장 결핍되어 있는 용감한 무사 정신의 대표자인 우리 일본 민족은, … 봉건적 교육과 이것에 기초한 경제 단위의 발전을 아무것도 실현하지 못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그 부패 쇠망을 극에 달한 민족적 특성을 근본적으로 소멸시킴으로써, 자신에게 동화시키는 자연적 운명과 의무를 가진 우수한 문화의 중대한 사명에 임하는 자가 아닐까!
이는 러일 전쟁 직전에 쓰여진 논문의 핵심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 행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즉, 조선은 스스로 근대화할 수 없고 일본에 동화되어 일본의 국력을 빌려야만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으며, 일본은 조선의 근대화를 돕는 사명이 있다는 침략 야욕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현대 한국 연구자들에게 비판받고 있다.[25]
5. 저서
- ''Die gesellschaftliche und wirtschaftseinheit in Japan''|디 게젤샤프틀리헤 운트 비르트샤프트자이닛 인 야판de (슈투트가르트: Cotta, 1900) (사카니시 요조 번역, 『일본 경제사론』, 호분관, 1907년)
: 뮌헨 대학교에 제출한 박사 논문
- 『국민 경제 원론』 (철학서원, 1903년)
- 『경제학 연구』 (동문관, 1907년)
- 『경제학 강의』 (오쿠라 서점, 1907년~1909년)
- 『국민 경제 원론 총론』 (오쿠라 서점, 1910년)
- 『경제학 교과서』 (오쿠라 서점, 1911년)
- 『경제학 고증』 (사토 출판부, 1918년, 개정판 1921년)
- 『여명록』 (사토 출판부, 1919년)
- 『현대의 상업 및 상인』 (다이토칸, 1920년, 증보 개정판 1925년)
- 『암운록』 (다이토칸, 1920년)
- 『경제학 논고』 (다이토칸, 1921년)
- 『사회 정책과 계급 투쟁』 (오쿠라 서점, 1922년)
- 『볼셰비즘 연구』 (개조사, 1922년)
- 『사회 운동과 노동 제도』 (개조사, 1922년)
- 『경제 위기와 경제 회복』 (다이토칸, 1923년)
- 『부흥 경제의 원리 및 약간의 문제』 (동문관, 1924년, 복각판 2012년)
- 『유통 경제 강화』 (다이토칸, 1925년)
- 『국제 신의의 입장에서 본 도쿄시 불화채 문제』 (채권 협회 출판부, 1926년)
- 『유물 사관 경제사 출발점의 재음미』 (개조사, 1928년)
- 『후생 경제 연구』 (도에이 서원, 1930년)
- 『후생 경제』 (고단샤 학술 문고, 1980년)
:야마다 유조 편에 의한 저작 신판
- 『생존권의 사회 정책』 (고단샤 학술 문고, 1980년, 초판 1948년)
:아카마츠 카나메 편에 의한 저작 신판
- (루요 브렌타노) 『노동 경제론』(동문관, 1899년)
- 아돌프 바그너, 루요 브렌타노 [최근 상업 경제론](Rujo Brentano, 세키 하지메와 공역, 오쿠라 서점, 1902년)
- 『후쿠다 도쿠조 저작집』(후쿠다 도쿠조 연구회 편, 신산사), 2015년 - 간행 중
6. 관련 인물
후쿠다 도쿠조는 소우다 키이치로, 사카니시 요조, 고이즈미 신조, 아카마츠 카나메 등 여러 제자들을 길러냈다. 또한, 무토 산지, 사카이 도시히코일본어 등과 교류하였다.
6. 1. 제자
- 소우다 키이치로
- 사카니시 요조
- 고이즈미 신조
- 아카마츠 카나메
- 이토 한네
- 오오츠카 카네노스케
- 오오쿠마 노부유키
- 오오니시 이노스케
- 타카시마 젠자이
- 스기모토 에이이치
- 테즈카 스에지로
- 나카야마 이치로
- 야마다 유조
- 우에다 테이지로
- 후쿠다 케이타로
- 미야시타 코키치
- 미야타 키요조
- 노무라 켄타로
- 야기 스케시
6. 2. 기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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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Reimeikai
"" #Google books 템플릿은 출판사 정보가 명확하지 않음
200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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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oogle books 템플릿은 출판사 정보가 명확하지 않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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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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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セッション『復活する福田徳三の経済思想―『福田徳三著作集』の刊行に寄せ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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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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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 1930年05月10日
https://dl.ndl.go.jp[...]
193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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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dl.ndl.go.jp[...]
1930-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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講談社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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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建替論 〔100兆円の余剰資金を動員せ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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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K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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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K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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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現代韓日関係研究史―日本人の韓国史研究を中心に―
http://www.jkcf.or.j[...]
日韓歴史共同研究
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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